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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19-10-16 오후 6:03:00

봉사와 기부로 고난을 승화한 - 의재(宜齋) 정희영
[이경희의 소가 외다리 건너는 이야기]

기사입력 2019-09-26 오후 3:02:07

의재(宜齋) 정희영



1. 경산을 제2의 고향으로

 

그런 인연이 있다. 그냥 알고 지낸 지는 오래지만, 서로의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그런 사이. 정희영과 내가 그런 관계였다. 문득 그가 떠올랐다. 이참에 정희영이란 인간에 대하여 좀 깊이 탐색해보자고. 전화번호를 물어 연락했다. 그가 내 목소리에 당혹해하며 응대한다. 말을 놓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존대도 아닌 어정쩡하게 말을 주고받다가 약속을 밀어붙였다. 정희영과 나는 동년배이다. 같은 학교를 나오지는 않았지만, 경산이라는 공간에서 청소년기부터 청년기를 거쳐 장년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공감대가 꽤 넓다. 자녀 이야기부터 질문을 던졌다. 자신은 자랑할 것이 없다면서 사양했지만, 물꼬가 터지자 술술 이야기를 풀어냈다.

 

정희영은 1962년 의령 용덕면에서 이남일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고향과 가깝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경산으로 이사 와서 지금까지 경산사람으로 살고 있다. 대구 제일모직에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아버지는 중산동 제일합섬 창단사원으로 먼저 경산으로 왔다. 그와 동생들은 어머니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아버지 직장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온 가족이 경산으로 이주했다.

 

그에게 고향은 아직도 존재의 뿌리로 건재했다. 초계정씨 집성촌이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일가친척이다. 선조 부모님과 부모님 산소도 고향에 있고 외가도 의령이라서 경산으로 온 이후에도 자주 오갔다. 초등학교 시절 고향 친구들과는 일 년에 두 번씩 만난다. 어린 시절 기억을 끄집어낸다. 분뇨통 바깥을 감싸던 대나무 테두리를 빼내 그걸로 굴렁쇠를 만들며 놀았다. 굴렁쇠는 남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단다. 그 굴렁쇠가 대나무라 가벼워서 간혹 정미소 앞 기름 구덩이에 빠지면 무게감도 있고 오래 갖고 놀 수 있었다. 동네잔치가 있으면 돼지를 잡았다. 그때 얻은 돼지 오줌보로 추수가 끝난 논에서 축구를 하던 것도 즐거운 기억이다.

 

그의 집은 남천 강변과 가까운 서상동이었다. 그 시절 남천강은 수량이 풍부하고 물도 맑았다. 학교만 마치면 친구들과 남천 강변으로 달려 나가 놀았다. 주로 파리 낚시, 사발 낚시를 했다. 피리를 잡아 집에서 훔쳐 온 양념으로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된장과 고추장만 넣고 끓여도 꿀맛이었다.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옥곡동은 그 당시 과수원 지대였다. 지금 서옥교 다리 건너 둑에 넝마주이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았다. 너나없이 가난했던 시절, 재활용품을 모아 팔고, 동냥으로 끼니를 때우던 사람들이 있었다. 강 건너 아이들과 심심하면 돌 던지기 싸움을 했다. 감정이 있어서라기보다 조무래기 사내아이들의 놀이였다.

 

1970년대 한국이 막 산업화시대로 발돋움하던 시기였다. 산업 현장의 기계는 대게 외국산이었다. 외제기계는 조립과 수리가 까다로웠는데, 그 일을 아버지가 하셨다. 제일합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던 아버지는 아들이 손에 기름칠하는 일보다 사무실에서 펜대를 잡으며 살기를 원했다. 경산중학교를 졸업한 정희영은 대구상고로 진학한다. 중학교 시절 주산학원에 다니며 주산 1단 자격증을 취득한 그에게 상고진학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고향을 떠나 이주한 그의 가족이 척박한 타지에 뿌리내리기까지 어찌 고난이 없었으랴. 사람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월급은 대부분 술값으로 지출되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부업을 하며 가게를 꾸려나갔다. 고향인 의령에서 친척들이 올라오면 으레 그의 집에서 며칠씩 묵었다. 장남인 정희영은 일찍 철이 들었다. 대구상고에 다니던 때부터 아르바이트해서 용돈을 벌었다. 남문시장 헌책방 장부 정리를 도와주기도 했고, 학습지 판매도 했다. 그때부터 자본관리와 사회생활의 기본을 배운 셈이다.

 

 

2. 어머니께 금반지를 선물하다

 

▲ 어릴 적 정희영(우측 아래)
 

 

학교를 졸업한 정희영은 군대에 갔다. 군 생활을 하면서도 장교식당 장부 정리를 도와주기도 하며 알뜰하게 돈을 모은다. 제대할 때 어머니의 금반지를 선물로 해드렸다. 군대를 제대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집에 마실 나갔던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친구 집에서 놀다 집에 오니 어머니가 경북대학병원으로 실려 갔단다. 앞이 깜깜했다. 그때 막냇동생이 중학생 사춘기라 충격 받을까 봐 어머니의 입원 사실을 숨겼다.

 

수술은 잘 되었으나 합병증으로 신부전증이 왔다. 혈액투석을 받기도 하고, 투석 대신 복강에 약물을 투여하는 치료를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혈액투석은 의료보험 적용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집안의 한 기둥인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자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 살림도 엉망이 되었다. 온 가족이 돌아가며 어머니의 병간호에 매달렸다. 그 당시 시세로 집 몇 채 값이 병원비로 들어갔다.

 

한국인에게 어머니란 명사는 각별하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경제적 궁핍과 가부장제의 그림자 아래 일생을 살다간 세대는 희생과 고난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정희영의 어머니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상 섬김과 자식 뒷바라지로 고생만 하다 쉰셋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래서 그에게 어머니는 눈물이고 아픔이다. 다행이라면 어머니 생전에 정희영이 결혼을 해서 안살림을 맡을 며느리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나는 정희영에게 아픈 질문을 던졌다. 시어머니가 편찮으신데 아내가 어떻게 맏며느리 자리로 시집을 왔는지, 그리고 처가에서 반대는 하지 않았느냐고. 청년 정희영은 자재구매부서에 전도유망한 사원이었다. 품질관리 검수부에 참한 여직원이 있었다. 둘은 업무 상 자주 만나고, 싸웠다. 싸우다가 정이 들었다. 그의 장인은 고려대 법대를 합격했으나 사정상 입학을 못 하고 엽연초생산조합(, 담배인삼공사)에 근무했다. 정희영의 부친과 호형호제하는 친구의 형님이 장인어른과 같은 직장 동료였던 터라 혼담이 오갈 때 수월하게 진행이 되었다.

 

종갓집인 데다 시어머니가 병중이니 장모는 당연히 결혼을 반대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아내 이현주는 시어머니의 몫까지 일을 잘 했다. 어려운 집안의 장남에게 시집을 와 고생을 한 아내에게 정희영은 마음의 짐을 진 느낌이란다. 그리고 고맙단다. 더군다나 시어머니 작고 전에 손주까지 안겨드렸으니 이보다 더한 효도가 있을까.

 

지금도 그의 아내 이현주는 명현테크라는 자동차 부품조립회사를 경영한다. 종업원 서른 명을 거느린 경영자이다. 기계화가 어려운 수공업 형태의 부품조립 업체이다. 종업원이 대부분 주부들인지라 공감대가 넓은 부인이 자연스럽게 경영을 맡게 되었다. 공장의 잡다한 일은 남편이 도와주지만, 나머지 회사 운영은 아내가 알아서 한다. 정희영이 전자 부품회사를 경영할 때부터 그의 부인은 집에서 부품조립 수공업을 했다. 그쪽 분야에서는 베테랑이었다.

 

평생 강의와 글쓰기만 한 나로서는 존경스러운 여성이다. 남들보다 이른 쉰셋에 회사를 퇴직하면서 모든 경제권을 아내에게 넘겼다. 디자인을 전공한 딸이 일본 유학 중이라 올해만 뒷바라지하면 한숨 돌리지 않겠나 싶단다.

 

▲ 정희영의 농원
 


 

3. 진심으로 다가가니 문이 열리더라

 

전자 부품회사 자재구매과에 근무할 때였다. 선배가 독립해서 회사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패기와 용기가 있던 시절이라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선배가 있으니 든든했다. 텔레비전 평면 브라운관 부품을 개발하여 삼성전자에 납품했다. 하루 잠을 너덧 시간만 자도 피곤한 줄 몰랐다. 사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주야로 연구하고 일했다. 주부 사원들이 많았는데, 야간 근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직원들을 독려하며 신명 나게 일했다. 우리들 회사였으니까.

 

직원 백오십 명, 백 억 순이익이 났다. 우리나라 전자 산업이 한창 호황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정희영은 선배에게 직원들이 밤낮없이 열심히 일해서 회사가 이만큼 이윤을 남겼으니 약속한 대로 성과급을 줍시다.”라고 제안했다. 사장인 선배는 회사를 더 키우려면 자금이 필요하다면서 직원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단호하게 회사를 나왔다. 그가 퇴사하자 회사경영이 힘들었는지 선배도 회사를 정리했다.

 

정희영이 명현테크라는 회사를 세운 이야기는 감동의 드라마이다. 선배와 하던 회사를 나온 그는 부인이 하던 자동차부품 조립회사의 규모를 확장하기로 한다. 우선 공장을 구해야 하는데, 폐가처럼 방치된 공장을 소개받았다. 오동나무 세 그루가 공장 지붕을 점령하고, 공장 안은 잡초와 거미줄로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자금도 문제였다. 손에 쥔 돈이 넉넉하지 않으니 은행 대출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다 쓰러져가는 공장을 보고 은행에서 대출을 해줄 리 만무했다.

 

정희영은 며칠 고민을 하다가 공장 주인을 찾아갔다. “회장님, 공장을 사고 싶은데, 가진 돈이 얼마 없어서 은행 대출을 받아야 할 형편입니다. 이 상태로는 대출이 불가능하니 제게 공장을 수리한 후 현 가격대로 제게 파십시오.” 그의 말을 들은 회장은 기가 찬 지 허허 웃었다. 공장을 팔 사람보고 깨끗하게 수리를 한 뒤에 팔라니, 세상에 이런 억지가 없다. 직장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진심은 통할 것이라 믿고 도전장을 던진다. 정희영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공장 주인의 배려로 폐가처럼 방치된 공장은 산뜻하게 탈바꿈했다. 추측건대 진심과 간절함이 완고한 주인의 마음을 움직인 요체가 아니었을까.

 

새 공장을 은행 담보로 예상보다 훨씬 많은 돈을 대출받았다. 막대금을 치르자 회장님이 공장을 방문했다. 새로 단장한 공장을 보더니 허허. 공장 주인은 따로 있네. 다른 사람이 더 많은 돈을 준다 해도 이 공장은 안 팔았을 거야. 정 사장 꼭 성공해.” 라며 격려해 주었다. 실은 정희영이 제시한 가격은 시세보다 낮은 가격이었다. 직접 인부를 고용하고 자재를 사 와서 수리를 했다. 이웃들도 언제 새 공장이 생겼냐며 깜짝 놀랐다.

 

공장 주인은 무얼 믿고 정희영의 억지에 가까운 부탁을 들어주었을까.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했던가. 정희영의 진정성이 공장주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정희영이란 인물의 핵심이 진정성이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성장기 어머니의 병고와 죽음을 겪으면서도 인간의 본성을 훼손하지 않고 살아온 그를 다시 생각했다. 이런 진정성이 정희영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이자 자산이 아닐까. 무릇 세상살이의 시작과 끝이 사람관계인데, 그 관계성의 핵심이 진정성이니까.

 

 

4. 봉사도 기부도 중독이더라

 

▲ 사랑의 열매 나눔봉사단 활동
 

 

정희영은 스스로 자신은 리더형 인물이 아니라 참모형 인간이라 말한다. 리더가 되려면 냉정함과 결단력이 필요한데, 자신은 그런 기질이 부족하다고 한다. 무릇 인간이란 저마다 타고난 소질에 따라 살기 마련이다.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 이것 어려운 문제다. 본래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 에고(ego)라는 깃대를 붙들고 세상을 어떻게든 자기 방식으로 재편하려 든다. 정희영은 정의감이 강하고 직언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그래서 손해를 볼 때도 많았다. 걱정이 있거나 실수를 하면 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내성적 성격이란다. 그는 자신의 장단점과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 아무튼 어떤 조직이 돌아가려면 참모형 인간이 실무와 설거지를 해야 한다.

 

그는 경산에서 여러 단체에 회원으로 활동한다. 지역의 대표 봉사단체인 맥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재임 시에 경산에서 처음으로 실버노래자랑을 개최했다. 후임 회장이 그 행사를 이어가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한다. 이 외에도 경산시 체육회 이사, 경산문화원 이사, 남부동 청년회 회장, 남부동청년 특우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 외에도 사랑의 열매,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 라이온스 회원 등을 거쳤다. 현재는 바르게살기운동 경산시협의회 사무국장이다. 나는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런 정도로 지역에서 활동했으면 정치를 할 생각은 없냐고. 그는 손사래를 치면서 선을 긋는다. 지역에서 순수하게 봉사하는 숨은 일꾼이 있기에 세상은 돌아가는지도 모른다.

 

남부동 청년회장을 맡았을 당시에 복지담당자가 그에게 전화했다. 관내에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있는데, 평일에는 노인복지관에서 밥을 먹는데, 주말에는 밥을 굶는다며 후원을 부탁했다. 아내의 협조로 주말마다 그 할머니께 밥을 배달하고, 냉방에 기거하는 것을 보고 기름도 두 드럼 사비로 넣어주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권유로 한두 군데 후원하기 시작했지요. 봉사단체장을 맡으면서 당연히 앞장서서 후원을 했고, 술 한 잔 덜 마시고 후원하자.” 라는 단계로 발전했단다.

 

그는 사랑의 열매 봉사단 경산시 초대단장,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경산시후원 회장을 역임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이십여 년 간 후원하고 있다. 월드비전 등에도 매달 후원을 한다. 착한가게는 부부가 두 계좌 가입했고, 그의 아내는 세이브 칠드런, 시온재활원 후원 회원이다. 정희영은 그렇다 치자.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했던가. 봉사든 기부든 그의 아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정희영을 이런 사람으로 살아가게끔 묵묵히 지원하는 그의 아내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지속성은 진정한 실력의 증표이다. 꾸준히 기부한다는 것은 삶의 지향이 나보다 타자를 향한다는 것을 말한다.

 

봉사와 기부는 마약 같다. 안 하면 이상하다. 어머니가 신장이식을 못 해 일찍 돌아가신 것이 한이 되었다. 그래서 장기기증과 조직기증 서약도 했다. 우리 부부가 살고 재산이 남으면 사회에 다 기부하고 갈 생각이다.” 후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자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운 상황을 보고 외면하지 못하는 양심이 살아있는 이들이다. 정희영도 경제적으로 관점에서 보면 평범한 중산층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누구보다 큰 부자이다. 인터뷰하면서 겨우 한 군데 후원하는 내 작은 손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5. 서예 초대작가가 되다

 

▲ 정희영의 서예작품
 

 

정희영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한학자였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막연하게 서예에 대한 꿈을 가졌던 것 같아요. 선배가 장산서실 회원이었는데, 서실에 놀러 갔다가 원장인 장산 박도일 선생이 권유해서 입문하게 되었지요. 늦게 입문한 만큼 선배들을 따라가려고 매일 밤을 새워가면서 연습했어요. 장산 선생님도 아무리 술에 취해도 집에 안 가고 지도를 해주셨지요. 그때 장산 선생님께 의재(宜齋)라는 아호도 받았지요.” 하루도 그르지 않고 서실에 출근하며 연습한 결과 이듬해 삼성현 미술대전에 출품해서 입선한다. 이후 대한민국 서예대전 입선, 10회 삼성현 미술대전 대상의 영예를 거머쥔다. 추천작가를 거쳐 초대작가라는 명예를 안았다. 이후 대한민국 서예신문대전 심사위원에 위촉될 정도로 일가를 이루었다.

 

화초 가꾸기도 취미란다. 의외였다. 어릴 때부터 꽃밭 가꾸기를 좋아했다. 다 죽어가던 화초도 그의 손에만 오면 살린다. 화초를 잘 가꾸는 비결을 물었다. “화초도 종류에 따라 물을 좋아하는 것도 있고, 싫어하는 것도 있어요. 가지치기도 화초의 성질을 보고 해야 잘 자라요.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는 양지에, 햇빛을 싫어하는 화초는 반그늘에 두어야 해요.” 한마디로 화초의 성질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일 터이다. 청도 매전의 매실농장에도 계절마다 다르게 피는 꽃을 심고 가꾼다. 농장 지킴이 개 두 마리의 밥을 주기 위해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농장에 가는데, 꽃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인생의 중년기를 갓 넘긴 정희영의 삶은 사연이 많다. 누구보다 밀도 있게 삶을 살았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가슴 아프고 후회스러운 일도 많았으리라. IMF 때 아이들 학원비도 없어서 방학 때 집에만 있게 했다. 부부가 공장 일에 매달려 바쁘다 보니 아이들 챙겨줄 틈이 없었다. 종일 집에서 에어컨을 틀었으니 전기세가 아파트단지 전 가구에서 일이 등을 다투었다. 바쁜 중에도 성장기에 아이들과 전국으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도 성장하여 제 길을 찾아 떠나려 한다.

 

대체로 인간의 삶이란 결핍 아니면 과잉이다. 이 극단의 간극을 메워나가는 과정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다만, 결핍의 기억에 자신을 매몰시키지 않고 디딤돌로 삼는 자만이 생의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정희영은 성장기의 가난과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다행스럽게도 그는 타인에 대한 봉사와 기부로 가난을 승화시킨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정신적 성숙의 진경(進境)에 들어선 듯싶다.

 

정희영 자신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별로 이룬 것이 없는 인생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취미로 시작한 서예도 초대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니,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게다가 서각과 화초 가꾸기를 취미로 하고, 지역의 사회단체에 봉사하면서 기부도 많이 한다. 아직은 몸이 괜찮으니 친구들과 술 한잔 하는 즐거움도 좋단다. 이만하면 괜찮은 인생 아닌가.

 

정희영을 인터뷰하면서 그의 이야기가 몸에서 나오는 체화(體化)된 언어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빈말이 거의 없었다. 젊은 날 전자 부품회사 자재구매부에 일하면서 상고 출신인 그는 대기업의 엘리트 사원들을 상대하며 협상했다. 그들이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정희영은 경험과 독학으로 마스터했다. 시간이 흐르자 현장 경험과 지식으로 무장한 그는 누구든지 맞상대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의 이야기는 가볍지 않았다.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신뢰, 한 집안의 장남으로 내면화한 책임감 등. 온몸으로 세월을 걸어온 자만이 내뿜는 아우라가 있었다. 누구나 감당해야 할 삶의 숙제가 있다. 정희영은 그 숙제를 진정성과 성실함으로 수행한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인생에 무엇을 하고 싶냐, 라고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그동안 삶을 돌아보니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요즈음이 생의 전환기다. 특별한 꿈을 세우기보다 지금처럼 이웃에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 하나를 소개했다. 덕불고 필유린 (德不孤 必有隣), 즉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아서 반드시 이웃이 있기 마련이다, 라는 논어 이인 편에 나오는 말이다. 그가 베푼 덕이 당장 되돌아오지 않은들 어떠랴. 그가 쌓은 덕으로 인해 누군가가 한 끼 밥을 해결하고, 마음 가난한 아이가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면 족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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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인터넷뉴스(ksi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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